할머니의 상속 주택과 유언대용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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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에 사셨던 91세 할머니께서 작년 이맘때쯤 유언대용신탁을 하시고,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과 후에 자녀들 간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유언대용신탁을 계약할 당시 할머니의 연세는 90세였습니다. 할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셨고, 자녀는 아들 2명과 딸 1명이었는데, 이 중 막내딸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결혼하여 지금까지 쭉 미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재산이 많으셨지만, 어찌하다 보니 그 재산을 모두 국내에 있는 자녀들(아들 2명)에게 생전에 증여하여 막내딸은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미리 증여하면서도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자녀들에게 나중에 막내의 몫은 꼭 챙겨주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할머니께서는 여러 차례 할아버지의 유지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들들은 “증여세가 나온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약속을 미루어 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사후 10년간을 기다리다 결국 할머니는 본인 명의의 집과 현금 모두를 막내딸에게 주겠다는 내용으로 유언대용신탁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들들이 알게 되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누가 안 챙겨준다고 했느냐?”, “굳이 신탁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지금이라도 신탁을 해지하시라”라며 모친을 압박했습니다. 실제로 자녀들이 은행으로 찾아와 신탁 내용을 확인하고자 했고, 모친이 고령이라며 “은행에서 모친을 설득한 게 아니냐?”, “이 계약이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모친과 은행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잠시 말씀드리자면, 신탁의 경우 고령의 위탁자가 유언대용신탁을 계약하려면 신경과 또는 정신과 전문의의 ‘의사소견서’가 필수입니다. 방금과 같은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죠. 신탁은 신탁법에 근거한 ‘계약’이므로 계약 당사자는 법률 행위를 할 수 있는, 즉 의사 능력에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이번 계약에서도 당연히 정신과 전문의에 의한 “신탁 계약을 하실 수 있다는 의사소견서”를 받았고, 치매 검사(MMSE)에서도 30점 만점에 26점이라는 (연세에 비해) 높은 점수를 받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들들의 계속적인 설득과 읍소로 신탁 계약을 해지하려는 시도는 수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의사소견서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번거로운 이유로 그분들의 시도는 좌절되곤 했습니다. 실제로 어르신들이 신탁 계약을 위해 처음 한 번은 소견서를 받아 오시기는 하지만, 병원에서 질문도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여 다시 발급받아 오라고 하면 못 받아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경우도 할머니 본인의 확고한 뜻이 있었기에, 자녀들에 의해 등 떠밀리면서까지 병원에 가려고 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만일 할머니께서 신탁이 아닌 유언장 방식으로 준비를 하셨다면, 살아생전에 다양한 시도가 있었을 듯합니다. 아들들의 강요에 의해 다른 유언장이 작성되었을 수도 있고, 금전의 경우 본인도 모르게 출금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신탁은 쌍방 간의 계약이고, 위탁자에게서 수탁자인 은행으로 명의가 이전되는 계약이므로, 금전의 경우 계약서에 명시한 용도 외에는 함부로 출금되지 않으며, 부동산의 경우 신탁 후에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기 위해 공증 사무실을 찾더라도 본인 명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언장 작성이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언대용신탁은 기존의 유언장 방식과는 달리 위탁자 생전에도 흔들림 없이 유언을 보호해 주고, 사망 후에는 계약서 내용대로 투명하게 집행되므로 상속인 간의 분쟁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할머님이 돌아가시자 은행은 상속 집행자의 지위에서 곧바로 금전과 부동산을 막내따님에게 이전해 드렸는데요, 막내따님께 조심스레 금융기관의 집행에 대해 오빠분들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큰오빠께서는 모친의 전 재산이 막내에게 가게 되어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이미 자신들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았고, 막내 몫을 챙겨주라는 아버지의 유훈도 있었기에 이것이 공평한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머니의 뜻이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어머님의 신탁 계약 덕분에 오빠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다며 고마움도 표시하셨습니다.
유언장이 아니고 신탁 계약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신탁은 위탁자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게 해 드릴 뿐 아니라 남은 가족들이 더 이상 멀어지지 않게 도와드리는 선량한 상속 집행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컨설팅부 치매안심금융팀
황지섭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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