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슈퍼리치' 모바일로 수백억 투자
재테크 판이 바뀐다
(4)디지털이 바꾼 자산관리 트렌드
'디지털 슈퍼리치' 모바일로 수백억 투자
MTS 계좌 5000만개 돌파

국내 증권사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 계좌 중 올해 들어 한 번 이상 거래 실적이 있는 ‘활동 계좌’가 5000만 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 사이에 두 배 이상 급증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등록된 국내 전체 주식거래 활동 계좌가 7387만 개임을 감안하면 전체 국내 주식 투자의 67%가 휴대폰을 통해 이뤄지는 셈이다.
한국경제신문이 9일 국내 주요 10대 증권사의 MTS 거래 현황을 조사한 결과 올해 한 번 이상 거래 실적이 있는 활동 계좌는 4649만 개에 달했다. 중소형 증권사까지 합하면 5000만 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고액 자산가들이 모바일로 수백억원어치씩 거래하는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증권사들은 MTS에 고위험 상품군인 주가연계증권(ELS), 파생결합증권(DLS)을 비롯해 각종 펀드와 장외채권, 신종자본증권 거래까지 지원하면서 이들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문중 땅 판 돈으로 국고채 사세요"…'인공지능 PB'가 수십억 투자 제안
고액 자산가 비대면 거래 급증고객…투자성향 3초면 분석 끝
40대 A씨는 투자해둔 20억원어치 채권의 만기가 돌아오자 스마트폰을 켰다. 삼성증권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에 접속해 디지털 프라이빗뱅커(PB)와 상담하기 위해서다. 디지털 PB가 이 고객을 응대하는 동안 한쪽에선 인공지능(AI) 시스템이 이 고객이 반복 언급한 상품군과 최근 거래 내용을 분석해 성향에 맞는 유망상품을 뽑아냈다. 이 PB는 그에 맞춰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파킹형·월배당형 상장지수펀드(ETF)를 고객에게 추천했다. 결국 이 고객은 지점 방문 한 번 없이 온라인을 통해 20억원을 재투자했다.
자산관리(WM) 시장에서 고액 자산가들의 디지털 거래가 활성화하고 있다. 증권가 큰손으로 떠오른 이들 ‘디지털 VIP’는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SNS와 유튜브 채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투자 정보를 취합한다. 증권사들도 각종 비대면 서비스와 AI 기술 도입에 사활을 걸고 있다.
10억원 거래도 ‘덜컥’…디지털 VIP의 힘
9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NH투자증권의 디지털 자산가 관리 서비스 ‘디지털케어 플러스’(투자 자산 1억원 이상)의 고객 수는 지난해 말 1만4567명에서 최근 1만8865명으로 증가했다. 신한투자증권(myPB 프리미엄 멤버스·3억원 이상)은 지난 3월 출범 후 3개월 만에 회원이 4200명을 돌파했고, 삼성증권(S라운지 VIP·10억원 이상)도 얼마 전 3000명 문턱을 넘겼다. 삼성증권은 100억원 이상 디지털 VIP 고객도 100명 이상을 확보했다.
증권사 디지털 VIP는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거래가 활성화하면서 급증했다. 비대면이라고 하더라도 대접은 오프라인 점포 못지않다. 실시간 기관·외국인 매수세와 종목별 투자정보 제공, 온라인 세미나 및 비대면 컨설팅 등은 기본이다. 여기에 증권사들은 세무 처리, 골프 레슨, 명품 기프트 등을 동원하며 디지털 VIP 마음을 사로잡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면으로 유대를 쌓는 구조가 아닌 만큼 언제 어떤 형태의 큰 거래가 터져나올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봉기 NH투자증권 디지털고객관리본부 대표는 “최근 디지털케어 플러스 비대면 컨설팅을 20차례 받은 한 60대 개인 고객이 문중 자산 10억원어치를 꺼내 들어 국고채를 매수하기도 했다”며 “눈에 보이는 MTS 잔액만으로 이들의 상품 구매력을 오판하지 않는 것이 디지털 VIP를 대하는 첫 번째 자세”라고 말했다.
AI, 고객 ‘속마음’ 3초 만에 파악
디지털 PB의 역할도 중요해졌다. 비대면 고객이 원할 시 언제든 각종 문의를 처리하는 이들은 각사 디지털 자산가 관리 서비스의 핵심이다. 이들은 성과지표(KPI)마저 일선 점포 PB와 다르다. 거래 따내기가 아니라 평소의 고객 만족도에 초점을 맞춘다. 현재 삼성증권(100명), NH투자증권(90명)을 필두로 미래에셋증권, KB증권, 신한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등이 20~50명의 인력을 운용하고 있다.
이찬우 삼성증권 디지털부문장은 “비대면으로 월평균 1000억원을 거래하는 ‘디지털 VVIP’까지 등장하면서 디지털 PB 인력 확충과 전문성 확보는 필수가 됐다”며 “디지털 자산가의 수요를 파악해 MTS 개선에 참고하거나 가상자산 세무 상담을 하는 일까지 디지털 PB가 도맡고 있다”고 말했다.
AI 기술도 디지털 VIP를 공략할 첨병으로 떠올랐다. 우선적인 활용처는 디지털 PB가 모인 디지털 센터다. 비대면 일상화로 성향 파악이 어려워진 만큼 데이터와 AI를 바탕으로 고객 속마음을 공략하는 것이다. ‘STT(speech to text)’ 기술을 통해 전화 통화 내용을 텍스트로 치환하고 AI에 학습시킨다. 고객이 타깃데이트펀드(TDF)를 반복 언급하면 최근 MTS의 거래·검색 내용과 대조해 투자 성향에 맞는 상품을 찾아내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AI는 디지털 PB에게 자동으로 어려운 용어를 검색해주거나, 고객이 원하는 의도를 파악해 답변해야 할 키워드를 3초 이내에 미리 띄워주기도 한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집집마다 수박 돌리기는 '옛말'…유튜브로 영업망 넓히는 PB들
과거 아파트 돌며 명함 뿌렸지만
MTS 발달로 지점 찾는 사람 '뚝'
SNS 홍보 등 영업방식 확 바뀌어
‘월급쟁이를 위한 연 30% 수익률 투자법’ ‘제2의 테슬라가 될 종목 찾는 법’….
2년 전 직무를 바꿔 프라이빗뱅커(PB)업계로 뛰어든 A씨. 그는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서 투자자 이목을 끌 만한 내용을 1시간 분량으로 담아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비대면 제자’들이 고객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A씨는 “무작정 명함을 돌리는 것은 예전 방식”이라며 “주변에도 유튜브나 SNS 등 각종 영업을 동원한다”고 설명했다.
자산관리 시장이 디지털로 옮겨가며 일선 지점 PB들의 영업 풍경도 바뀌고 있다.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 확장과 디지털 VIP들 부상 이후로는 대면 영업이 저물고, 이메일·유튜브·SNS를 총동원해 원격 홍보에 나서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9일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국내 44개 증권사의 국내 영업지점 및 영업소 수는 784개로 나타났다. 2011년 1647개로 정점을 찍은 지점 수는 꾸준히 줄어 2020년 처음으로 1000개를 밑돌았다. 이후로도 감소세는 이어져 최근 3년 동안 908개(2021년), 870개(2022년), 803개(2023년)로 축소됐다.
2000년대 본격화한 PB 서비스는 약 20년간 오프라인 지점을 중심으로 비슷한 영업 방식을 유지했다. 업무지구와 부촌 위주로 대면 영업을 펼친 다음 지점으로 고객을 끌어오는 것이 핵심이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입구에 파라솔을 설치해 전단을 뿌리고, 집마다 수박을 돌리던 모습은 근무 경력이 긴 PB들에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현장에서 질문지도 직접 작성받아 자연스럽게 지점 방문을 유도했다.
대형 증권사 24년 차 PB인 B씨는 “업계 용어로 ‘빌딩탕’이라고 부르는데, 강남 일대 빌딩을 돌아다니며 명함을 뿌려 고객을 영입하기도 했다”며 “당시엔 이렇게 확보한 고객이 지점에 줄을 설 정도여서 은행 창구처럼 자리에 앉아 상담을 처리했다”고 회고했다.
2010년대 후반부터 MTS가 발달하고, 2020년 코로나19 확산까지 겹치며 고객들은 더 이상 지점을 찾지 않았다. 지점 수가 줄며 PB들은 비대면 영업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회사가 여는 비대면 투자 세미나에서 디지털 VIP 연락처를 확보하거나, 계열 은행의 우량 고객 메일 리스트까지 확보해 자신의 투자 노하우를 담은 보고서를 돌리는 경우가 흔해졌다. 유튜브 방송 출연이 새로운 영업 방식으로 ‘반짝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카카오톡 단체방 및 텔레그램 채널을 운영하며 자신을 알리거나 투자 교육 사이트에 강사로 등장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4년 차인 한 PB는 “비대면 영업에선 회사 인지도도 중요하다 보니 계열 은행이 있는 대형 증권사로 이직하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75세도 거뜬…정년 없는 직업"
시니어 일자리로 뜨는 PB
퇴직한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합니다.
일단 75세까진 쭉 해보려고요.
하헌상 NH투자증권 당진WM센터 이사는 1955년생으로 올해 69세다. NH투자증권의 최고령 프라이빗뱅커(PB)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PB는 성과만 낸다면 정년이 없는 직업”이라며 “디지털 시대에도 노하우와 끈기만 있다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충남 당진은 평생 떠나본 적 없는 그의 고향이다. 초·중·고교를 당진에서 졸업하고, 곧바로 당진 지역 농협은행에 일자리를 잡았다. PB 일을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다.
그는 오랜 PB 생활의 비결로 지역에서의 활발한 모임 활동을 꼽았다. 20년 가까이 초·중·고 동창회 임원직은 도맡아 했다. 교인 7000명 규모로 지역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에서도 모임을 이끈다. 이젠 고객이 고객을 소개하고, ‘당진에선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는 자신감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하루 세 시간씩 개인 공부도 놓지 않는다. 매일 오전 8시엔 30분간 회사의 온라인 강의를 통해 미국 인공지능(AI) 대표주 동향, 신규 상장지수펀드(ETF) 상품 특징 등 다양한 주식 및 금융상품 정보를 듣는다. 제철소가 포진한 당진 지역의 PB답게 신협 등 상호금융권과의 관계 구축에도 노력한다. 이곳에 법인 자금이 몰려 있어서다.
그는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으로 기존 발품팔이식 영업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하 이사는 “대면으로 큰 거래를 따내기 어려워진 점이 있다”며 “하지만 고객들이 비대면 거래를 시작하면서 궁금증이 많아지고, 여러 상품에 관심을 더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디지털 전환이 PB들과의 접점도 더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